유대인 교육은 원리에 따른 교육이다


유대인이 교육의 민족으로 세계에서 두각을 발휘하게 된 근본 이유는 방법이 아닌 원리에 있다. 그들은 교육의 교과서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수 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교육교과서인 토라와 탈무드가 있다. 탈무드 역시 성경을 원리로 하여 만든 교육서이다. 유대인의 모든 교육은 이것을 근간으로 한다. 물론 학교 뿐 아니라 가정도 마찬가지이다. 토라는 모세오경으로 이야기와 가르침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스라엘이 누구인지, 이스라엘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일깨워 주는 가르침의 책이다. 토라는 본래 권위적인 가르침, 지침을 가리킨다. 우리로 말하면 길. 도(道)라는 뜻이다. 토라 중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말씀이 쉐마다. 쉐마는 ‘들으라’는 의미로 신명기 6;4-9까지 내용이다.

이것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둘째,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해야 할 도리는 하나님을 전인적으로 사랑하는 일이다. 셋째,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과 자신의 자녀에게 해야 할 도리는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다. 유대인 교육은 이 세 가지를 원리로 해서 교육과정이 구성되었다. 쉐마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아침과 저녁으로 반복하여 이 말씀을 암송한다. 그들은 평생 동안 쉐마를 통하여 교육의 목적과 방향을 기억하면서 교육에 임한다. 유대인의 모든 공부와 교육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일시적이고 실용적인 교육 보다 인간의 도리를 먼저 가르치고 그것을 삶에 적용한다. 방법은 변하지만 원리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유대인 교육은 원리에 충실한 교육이다.


토라(성경)는 모든 교육의 원리다


교육은 창조적인 작업이다. 인간이 교육을 받으면 창조적인 사람이 된다. 이것이 인간에게 교육이 필요한 이유이다. 그러나 인간의 창조는 하나님의 창조에 근거를 둔 재창조의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다. 모든 지식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데서 출발한다.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모든 지식들은 알고 보면 하나님의 창조에서 재발견된 것들이다. 만약 하나님을 모른다면 그 교육은 헛된 것이 된다. 뿌리 없는 교육이 될 수 밖에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가 기록된 책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고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역사는 하나님이 이끌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가 기록된 책이 성경이다. 세상의 모든 원리는 성경에서 나온 것이다. 성경은 모든 교육의 원리가 된다. 성경은 단순한 종교의 책 이상이다. 사람들은 성경을 종교적인 경전정도 밖에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교육의 교과서로 사용하는 것을 꺼린다. 그러나 세상과 인간의 뿌리를 알려면 성경은 필수적이다. 성경 속에는 어느 책에서도 가르쳐 주지 않는 세상과 인생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 것을 교육 원리로 근간을 삼으라


성경은 변하지 않는 영원한 진리로 안내한다. 진리를 공부하는 것은 교육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성경이 교육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사상이나 철학이 교육의 주체가 되면 안된다. 사상이나 철학이 주도하면 인간의 인성 보다는 철학과 사상으로 만들어진 이념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 세상과 사람은 본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 말씀으로 창조된 사람의 변화는 오직 말씀으로만 가능하다. 이것이 모든 교육의 시작이 성경이 시작점이 되어야 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말씀은 히브리어로 ‘다바르(dabar)’ 이다. 이 뜻은 “나중에 있는 것을 이전으로 쫓아내고 몰아버린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바르’는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것, 행위적인 것을 포함한다. 또 ‘다바르’ 는 “창조능력”, “사건”이라는 의미와 함께 “ 모든 것의 근원” 이라는 뜻도 포함된다. 창조의 힘은 곧 말씀입니다. 말씀은 모든 것의 시작이다. 성경을 뿌리로 삼는 것은 교육의 시작을 하나님으로 시작한다는 것을 뜻한다.


자연을 뿌리로 하는 교육


일반교육은 성경이 아닌 자연을 뿌리를 두고 있다. 자연은 물질이다. 그들은 인간을 자연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한다. 일반 교육에서 자연은 인간 보다 늘 앞서 있다. 예를 들면 우주와 물질을 모든 것의 근원으로 보고 교육을 한다. 인간은 자연의 부산물로 본다. 그러나 자연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아무도 밝히지 못한다. 빅뱅 이전의 일에는 침묵하고 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교육은 자연을 모든 것의 시작으로 보고 가르친다. 어떤 경우는 자연을 신이라고 말한다. 고대부터 신을 해.달,별등과 관련시켜 이해한 것도 이런 맥락과 같이 한다. 인간은 오랫동안 자연의 지배속에 있었다. 인간이 동물보다는 고등하지만 늘 자연 보다는 한수 아래로 본다. 이것이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교육의 기본 틀이다. 이런 교육론은 루소의 <에밀>의 영향에 따른 것이다.


에밀의 교육론의 문제점


지금도 루소의 교육론은 우리 교육론의 근간이 되고 있는 명저다. 하나의 소설형식으로 쓴 <에밀>은 교육론이다. 그는 여기서 자연. 사물. 인간의 세가지 측면을 말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자연의 교육‘이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이 가장 자유롭고 행복하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이 불행하게 된 것은 사회나 제도와 문화 때문이라고 보았다. 인간성 회복을 위해서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이라 보았고 이것을 교육에 적용했다. 그러나 루소는 인간의 본질을 잘 못 이해했다. 루소는 인간의 죄악의 원인을 인간이 자연에서 떠난 것으로 보았다. 이런 그의 가설은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인간이 타락하고 부패한 것은 자연을 떠났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의 죄악의 모습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루소의 한계는 어쩌면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죄가 들어 온 것은 인간이 스스로 근원임을 주장한 교만 때문이다. 이런 인간의 교만함은 모든 인간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다.



일반교육에서 사용하는 자연교육으로는 한계가 있다



자연은 이러한 인간의 죄를 해결할 수 없다. 물론 자연의 섭리를 통해서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하고 겸손하게 자기를 깨닫는 어느 정도 완화의 기능은 할 수 있지만 인간의 본질적인 마음의 죄를 해결할 수 없다. 인간이 산속에 들어가서 산다고 해서 인간의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다. 산속에 있을 때는 조금 완화가 되는 듯하지만 세상에 내려오면 그 본성은 어느새 다시 나타난다. 이것은 우리가 경험적으로 볼 때도 문제성 있는 교육 이론이다. 종종 사람들은 루소의 자연 교육론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해결을 더 어렵게 한다.

이런 교육론을 주창한 루소 본인 자신조차도 실상 자녀를 고아원에 보내는 등 실패한 교육을 했다. 루소의 비인간적인 이중성은 그의 사생활에서 드러났다. 많은 여성들과 동거하면서 결혼생활은 실패했다. 만년에는 피해망상증으로 괴로워 하다가 66세의 나이로 죽었다. 본인에게 숨겨진 죄악성을 해결하지 못했다. 자연이 그를 성적인 욕망에서 자유롭게 해주지 못했다. 그가 주장한 교육론은 인성에서는 실패한 교육 이론임을 보여주는 사례다. 루소의 교육론은 인간의 부패한 마음과 욕망을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음을 알게 한다.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악한 지, 루소 스스로 후대의 사람들에게 보여 준 것이다. 그런데 이런 허상과 같은 교육론을 우리는 여전히 교육의 근간으로 삼고 있다. 교육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근원은 해결되지 않고 문제가 더 복잡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다.


토라 성경을 뿌리로 하는 원형교육이 필요하다


성경은 세상에서 밝히지 못하는 자연의 근원을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자연은 말씀으로 만들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 ( 창1:3) 그동안 세상 교육에서 배웠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자연 보다 말씀이 먼저다.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 인간은 자연 보다 나중에 창조되었지만 하나님을 대신하여 자연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능력을 부여받았다. 동물들의 이름을 아담이 지었다. 자연을 하나님의 섭리대로 관리하고 정복하는 것은 인간의 사명이다. 자연 보다 인간이 우위에 있다. 그리고 그 위에 하나님이 있다.


교육의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인간을 어떤 구조로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우리는 교육을 통해 본래 가졌던 세상의 원형을 회복해야 한다. 창조질서를 바르게 이해하고 그것에 따라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명을 갖고 있다. 뿌리 없는 잘못된 교육이 인간을 지배하면 교육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든다. 오히려 이런 교육은 교육을 할수록 점차 인성이 말라가고 허무한 삶이 된다. 이런 면에서 성경을 근거로 한 교육구조의 전환은 아주 시급하다.


한 대안학교의 가르침에서 배운 경험


필자는 오랫동안 섬겼던 기독 대안학교를 돌아 보면 다른 대안학교와 비슷한 구조로 교육과정이 설정되었다. 물론 세상의 교육 보다는 우수한 부분이 있지만 여전히 근본적인 문제에서 볼때는 부족함이 많다. 예를 들면 학교의 가장 중요한 목표를 ‘성경을 기초로 하는 교육’을 말하고 있다. 세부내용을 보면 “ 인간관 –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고 타락 후 구원받아야 할 존재이다. 지식관 –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교육관 – 교육의 기준, 방법과 원리를 성경에서 찾는다“ 로 되어 있다. 교육의 전체가 철저히 성경중심을 지향하고 있다. 이것은 다른 학교와 차별이 되는 분명 우수한 점이다.

그러나 정말 교육의 뿌리가 성경이라면 철저히 성경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이 부분에서는 아직 명확한 교육관의 정립이 부족함을 보게 된다. 목표는 성경중심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에서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성경의 중요성에 대해서 아직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확신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것은 생각은 있지만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는 한계점이다. 이것은 다른 기독대안학교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교육은 뿌리를 어떻게 구축하느냐가 중요하다 – 한국교육의 가장 큰 약점


철저히 성경이 이끄는 교육이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저학년에서는 성경의 학습량이 월등히 많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다. 다른 과목과 비슷한 수준에서 성경을 배우고 있다. 중학교의 경우를 보면 일주일에 성경 과목은 2시간이 배정 되었다. 사실 이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렇게 되면 성경은 여전히 절대적인 과목이 아닌 상대적인 과목으로 존재하고 있다. 미션스쿨에서 마치 종교과목으로 하나 들어 가 있는 것과 같다. 이것으로는 삶의 뿌리를 세우는데 부족하다. 정말 교육의 뿌리가 성경이라는 확신이 든다면 철저히 성경을 배우는 과정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초등학교나 중학교의 경우에 성경의 시간을 더 늘리거나 오전에는 성경을 집중적으로 배우고 오후에 일반 과목을 배우는 교과과정의 과감한 전환이 요구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릴적 부터 성경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 갑자기 중. 고등학교에서 성경교육을 강화 하는 것은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이때만 되면 학생들은 벌써 대학공부 준비 때문에 차분히 성경을 공부할 수 있는 여유를 갖지 못한다.



성경으로 학과목도 해결된다면 – 유대인 예시바학교가 잘 적용 하고 있다



사실 성경을 배운다는 것이 모든 학문의 기초를 성경을 통해 이미 숙달한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성경을 배우면서 영어와 국어의 논술과 토론과 쓰기와 읽기. 그리고 역사와 사회 등의 과목이 자연스럽게 터득할 수 있다)
물론 경험이 안 된 상황에서는 과연 그것이 현실에서 얼마나 설득력이 있게 교사와 학생과 부모들이 이해를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은 어려움이 있다. 현실적으로 제도권의 교육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학에 들어가는 방편으로서 교육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물론 한 번도 시도하지 못했기에 이런 교육에 대한 불안감이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교육은 한번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오랫동안 유대인 예시바 학교에서 이미 검증이 되고 있는 사례이기에 우리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한국의 신학교육의 문제점


이것은 신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에 작은 신학교까지 합치면 200여개 학교가 된다. 교단의 대표적인 신학교를 살펴보아도 이런 현상은 쉽게 알 수 있다. 적어도 학부 1-2학년에는 성경을 철저히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그것을 기초로 다른 학문들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안되고 있다. 신학교 조차도 성경은 많은 학문들 중에 하나로 존재한다. 실용적인 학문이 점차 대세로 자리 잡으면서 신학의 뿌리인 성경은 중심에서 밀려나고 있다. 당연히 신학교육은 기초가 흔들릴 수 밖에 없다. 신학교 역시 일반학교와 거의 비슷한 형태로 나가는 모습은 매우 안타깝다. 영적 지도자가 될 사람이 만약 신학교에서 성경을 잘 배우지 못하고 신학교를 졸업하고 현장에서 성경을 공부해야 하는 역현상은 오늘 우리 신앙교육의 현주소를 그대로 말해 준다.


유대인 교육의 원리를 적용하라


세상의 변하지 않는 가치를 붙잡는 유대인의 교육을 우리가 따라잡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유대인은 진리에 근거한 교육이기에 어떤 유행과 풍파가 닥쳐도 변함 없이 교육의 틀을 유지할 수 있다. 오늘 우리도 이런 변하지 않는 교육의 구조가 요구된다. 학교나 가정에서 이런 교육의 틀을 가진다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미 가문의 영광의 길이 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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