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하브루타 교육과 한국인의 하브루타교육

유대인교육의 핵심은 하브루타가 아니다

유대인은 누구도 하브루타가 유대인 교육의 본질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많은 방법중에 하나일 뿐이다. 하브루타 방법을 중시하는 얼마 유대인 이외는 보통은 하브루타를 우리처럼 특별한 공부법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유대인 교육의 핵심은 토라와 안식일과 공동체의 3가지를 통합하는데 있다
본질과 시간과 공간의 삼각형을 이루게 하는 연결이 유대인 하브루타의 본질이다
여기서 소통이 이루어지고 이런 만남을 통해 새로운 창조를 이루게 된다

이렇게 보면 하브루타는 단순한 공부법이 아니다. 관계를 친밀하게 하는 유대인의 삶의 양식이니다. 그런데 왜 하브루타를 이렇게 처음 소개했는지 궁금하다

하브루타는 모든 삶에 적용되는 유대인 사회를 하나로 묶어 주는 삶의 원리다
여기서 나온 것이 삼대문화 , 후츠파 문화, 창업문화. 절기문화. 공동체 네트워크. 토라탈무드 협력학습 문화 등이다,

하브루타를 나름대로 다음의 공식으로 정리해 보았다

토라(탈무드) x 안식일( 밥상머리 시간) x 공동체 ( 가정- 시나고그 회당- 예시바 학교 – 베이트 미드라쉬(평생학교)의 4중 벨트 네트워크) = 창의적인 유대인.

하브루타는 무엇인가?

여기서 하브루타의 정의가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 세가지 핵심의 관계를 서로 연결 해주는 x가 즉 연결고리가 하브루타입니다. 한국의 하브루타를 적용하려면 이런 관계를 이해하고 <본질 x 시간 x 공간 = 한국인( 나 자신) 을 응용하면 됩니다. 우리에게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정해진 시간은 있는가? 우리가 만나는 공동체 공간은 있는가?

하브루타교육은 질문 방법 보다 내용에 있다

우리는 유대인교육을 생각하면 질문하는 교육을 먼저 다가온다, 물론 유대인은 질문을 강조하지만 진짜 유대인 교육의 핵심은 방법이 아닌 내용에 있다. 헬라 철학 교육은 질문 중심이다. 늘 질문하면서 본질을 추구하는데 인생을 바치는 사람이 스토아 철학자들이었다. 지금도 철학자들은 이런 일을 반복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질문은 있지만 내용이 없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내용은 크게 문제가 안된다. 어떤 내용이든지 모두 공부이 대상이 되고 질문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내용보다 질문에 관심이 많다. 그것은 철저히 인본주의에서 온 교육방법이다. 그 배경에는 질문하는 인간의 가치를 높이는 의도가 있다.

성경을 보면 인간의 타락은 질문으로 들어왔다. 인간이 하나님이 만드신 선악과를 먹게 만든 방법은 다른 것이 아닌 질문이었다. 오직 인간만이 질문하고 답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 그것을 악하게 이용한 것이 뱀이 여자에게 질문으로 유혹했다. 여자에게 “하나님이 정말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는 불순종을 의도한 인간을 향한 최초의 질문이다. 이것은 질문을 잘못 사용하면 하나님을 거역하는 방향으로 갈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가장 질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철학이다.

철학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하나님을 믿기 보다는 거역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도 이런 배경과 깊은 연관이 있다. 오직 질문으로만 살아가다 보면 인간 중심이 되고 결국 하나님을 의심하게 된다. 한국의 하브루타 교육은 질문의 문화를 강조한다. 물론 질문이 중요하다. 질문이 없는 삶은 인간의 존재를 상실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지금 한국교육에 질문을 강조하는 하브루타교육은 어느정도 도전을 줄수는 있지만 내용이 빠진 질문으로만 나가면 오히려 교육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텍스트가 질문을 만든다

한국 하브루타 교육의 강점은 짝을 맺어 질문하는 것이다. 그런데 질문 방법으로만 보면 헬라 철학자들과 유대인은 거의 차이점이 없다. 오히려 유대인이 헬라의 프톨레미 왕조의 시기에 헬레니즘의 수사법과 질문방식을 도입한 측면이 많다. 유대인도 결국은 거대한 헬레니즘 문화의 지배를 받아 성경적인 문화와 다르게 변질된 점이 많음을 전제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유대인은 다른 민족과 다르게 왜 질문을 쉬지 않고 해오면서 그들의 문화가 되었고 우리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그것은 텍스트에 있다. 유대인은 세상보다 뛰어난 토라가 있지만 헬라철학가들은 인간이 만든 고전 텍스트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적이 아니다. 대화와 질문으로 고전을 만들어 간다고 보는 편이 옳다. 토라와 같은 성경이 있기에 유대인교육이 가능했다. 성경이야 말로 최고의 질문을 만들어 내는 질문 교과서인 셈이다

하브루타가 무엇인가?

한국에서 하브루타는


하브루타가 한국에 소개된지 어언 10여년이 흘렀다. 하지만 누군가 당신에게 “하브루타가 무엇이죠? 왜 하브루타를 하려고 합니까?” 하고 물으면 대부분 머뭇거리거나 대답을 잘 못한다. 왜 그럴까?

필자는 두 번의 하브루타에 관련된 일을 경험했다. 한번은 필자를 찾아온 한 분과 또 한분의 우연한 만남이다, 두사람의 만남은 아이러니하게도 공통적인 고민을 갖다가 필자와 만난 분들이다. 두 분이 모두 비슷하게 오랫동안 교육현장에 토론 교육에 모든힘을 쏟았다. 그러다가 더 나은 방법을 찾다가 하브루타를 만나 연구하면서 한분은 자격증을 가진 100여명을 배출한 하브루타 전문가(?)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만이다. 더 들어갈수 없었다. 그 다음을 찾으려고 수없이 헤메다 우연히 필자가 집필한 파르데스공부법을 통해 만나 필자를 찾아왔다.

또 다른 한분은 하브루타 문화교육사 자격증을 받고 나서 하브루타 맛보기 교육 3시간 받고 120명을 교육하는 하브루타 강사(?)가 되었던 특이한 경험을 가진분이었다. 그리고 두분의 결론은 나는 이후부터 하브루타 이름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 하브루타에서는 더 이상 원리와 퍼올릴 샘을 찾지 못한 것이 주된 요인이었다. 갈수록 언어유희가 넘치는 한국의 하브루타 현장을 보면서 고민하다 여기까지 왔다고 고백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

또 한번의 일은 어느 대학교에서 박사과정 중에 하브루타 과목을 필자에게 강의해 달라는 강의요청이 들어왔다. 제가 담당자가 물었다. “하브루타가 무엇인데요?” 그러자 그는 “질문하고 토론하는 것이요” 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이것이 지금의 한국 하브루타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도 잘 모르는 하브루타를 강의 해달라는 담당자의 말을 듣고 순간 의아 했다. 소개를 통해 저에게 강의요청이 왔지만 필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은 저는 그런 하브루타는 아직 잘 몰라요 . 일반 질문과 토론교육과 다를바 없는데… 그래서 저는 하브루타란 이름으로 강의하기가 어렵겠네요. “ 물론 어떻게 하브루타 강의를 하려면 할수도 있지만 모르는 하브루타를 강의 할수 없었다. 또 다른 누군가 하브루타 이름으로 강의 할 것이다. 그래서 또 하나의 학위가 나올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 본다.

이 두 사례는 지금 한국사회에 일어나고 있는 하브루타 현장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속에 우리가 들어야 할 메시지가 있다고 본다

하브루타 이름에 대한 고찰이 중요한 이유

하브루타가 한국교육에 영향을 미치는 역사를 이루려면 먼저 이름에 대한 정립이 우선이다. 유대인으로서 당대의 천재라 불렸던 언어학의 대가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한계는 곧 세계의 한계다“ 라고 말한 것처럼 명칭은 모든 것을 설명하는 척도다. 규정된 언어를 더이상 넘어서지 못한다. 이런점에서 지금의 하브루타 이름에 대한 재고찰이 필요하다

물건이 아무리 좋아도 브랜드가 약하면 성공할수 없다. 책도 제목이 안되면 성공이 힘들다. 영화나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이름은 정체성이며 그 콘텐츠를 가장 쉽게 핵심을 설명할수 있어야 한다. 이름은 그 내용을 설명하는 가장 압축된 단어다, 이런 점에서 이름에 대한 바른 고찰은 앞으로 하브루타 교육이 발전하는데 중요하다,

다음은 한 하브루타 단체에서 행한 하브루타 정의에 대한 필자가 제안한 토론 자료의 내용의 일부의 내용이다. (하브루타 이름과 정의의 재정의에 대한 토론 자료)

유대인에게 하브루타 이름의 의미

  1. 아람어에서 유래된 하브루타의 단어의 뜻은 “ 관계. 친구“ 의미를 갖고 있다
  2. 유대인이 말하는 하브루타에서 친구는 유대인의 친구로 유대인 동족에 관계한 제한된 의미다. 엄밀히 보면 이방인은 제외 된다. 우리가 하브루타를 사용한다해서 유대인은 우리를 친구로 과연 생각할까?
  3. 유대인의 하브루타는 토라와 탈무드를 함께 공부하는 친구를 말한다 (cf : 동양의 도반) 진리인 성경을 함께 공부하지 않으면 그와는 하브루타 친구가 아직 형성 안된 것이다)
  4. 본래 하브루타는 공부법이 아닌 관계적인 의미로 유대인 전체의 삶에 적용되는 광의적 의미다
  5. 하브루타는 유대인의 역사와 사회속에 형성된 정체성을 보여주는 이름으로 그들의 문화속에 스며든 보이지 않는 이름이다. 우리가 하브루타 이름을 사용한다해서 그들의 하브루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설픈 하브루타가 될수 있다.

  6. 유대인 사회에서 하브루타 이름이 모임속에 정착된 것은 1980년대의 최근의 일이다.( 이런점에세 정치성을 바르게 정립한다면 한국의 하브루타 교육도 늦지 않았다. 지금이 그것을 정립 할때다)

  7. 필자가 유대인 하브루타 교육방식과 같은 시도를 한 때가 1987년 교회 수련회 중고등부 성경공부 모임이었다. 그 이후에 하브루타교육을 접면서 같은 방식으로 성경을 공부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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