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하브루타 교육과 한국인의 하브루타교육

유대인교육의 핵심은 하브루타가 아니다

유대인은 누구도 하브루타가 유대인 교육의 본질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많은 방법중에 하나일 뿐이다. 하브루타 방법을 중시하는 얼마 유대인 이외는 보통은 하브루타를 우리처럼 특별한 공부법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유대인 교육의 핵심은 토라와 안식일과 공동체의 3가지를 통합하는데 있다
본질과 시간과 공간의 삼각형을 이루게 하는 연결이 유대인 하브루타의 본질이다
여기서 소통이 이루어지고 이런 만남을 통해 새로운 창조를 이루게 된다

이렇게 보면 하브루타는 단순한 공부법이 아니다. 관계를 친밀하게 하는 유대인의 삶의 양식이니다. 그런데 왜 하브루타를 이렇게 처음 소개했는지 궁금하다

하브루타는 모든 삶에 적용되는 유대인 사회를 하나로 묶어 주는 삶의 원리다
여기서 나온 것이 삼대문화 , 후츠파 문화, 창업문화. 절기문화. 공동체 네트워크. 토라탈무드 협력학습 문화 등이다,

하브루타를 나름대로 다음의 공식으로 정리해 보았다

토라(탈무드) x 안식일( 밥상머리 시간) x 공동체 ( 가정- 시나고그 회당- 예시바 학교 – 베이트 미드라쉬(평생학교)의 4중 벨트 네트워크) = 창의적인 유대인.

하브루타는 무엇인가?

여기서 하브루타의 정의가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 세가지 핵심의 관계를 서로 연결 해주는 x가 즉 연결고리가 하브루타입니다. 한국의 하브루타를 적용하려면 이런 관계를 이해하고 <본질 x 시간 x 공간 = 한국인( 나 자신) 을 응용하면 됩니다. 우리에게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정해진 시간은 있는가? 우리가 만나는 공동체 공간은 있는가?

하브루타교육은 질문 방법 보다 내용에 있다

우리는 유대인교육을 생각하면 질문하는 교육을 먼저 다가온다, 물론 유대인은 질문을 강조하지만 진짜 유대인 교육의 핵심은 방법이 아닌 내용에 있다. 헬라 철학 교육은 질문 중심이다. 늘 질문하면서 본질을 추구하는데 인생을 바치는 사람이 스토아 철학자들이었다. 지금도 철학자들은 이런 일을 반복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질문은 있지만 내용이 없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내용은 크게 문제가 안된다. 어떤 내용이든지 모두 공부이 대상이 되고 질문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내용보다 질문에 관심이 많다. 그것은 철저히 인본주의에서 온 교육방법이다. 그 배경에는 질문하는 인간의 가치를 높이는 의도가 있다.

성경을 보면 인간의 타락은 질문으로 들어왔다. 인간이 하나님이 만드신 선악과를 먹게 만든 방법은 다른 것이 아닌 질문이었다. 오직 인간만이 질문하고 답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 그것을 악하게 이용한 것이 뱀이 여자에게 질문으로 유혹했다. 여자에게 “하나님이 정말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는 불순종을 의도한 인간을 향한 최초의 질문이다. 이것은 질문을 잘못 사용하면 하나님을 거역하는 방향으로 갈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가장 질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철학이다.

철학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하나님을 믿기 보다는 거역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도 이런 배경과 깊은 연관이 있다. 오직 질문으로만 살아가다 보면 인간 중심이 되고 결국 하나님을 의심하게 된다. 한국의 하브루타 교육은 질문의 문화를 강조한다. 물론 질문이 중요하다. 질문이 없는 삶은 인간의 존재를 상실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지금 한국교육에 질문을 강조하는 하브루타교육은 어느정도 도전을 줄수는 있지만 내용이 빠진 질문으로만 나가면 오히려 교육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텍스트가 질문을 만든다

한국 하브루타 교육의 강점은 짝을 맺어 질문하는 것이다. 그런데 질문 방법으로만 보면 헬라 철학자들과 유대인은 거의 차이점이 없다. 오히려 유대인이 헬라의 프톨레미 왕조의 시기에 헬레니즘의 수사법과 질문방식을 도입한 측면이 많다. 유대인도 결국은 거대한 헬레니즘 문화의 지배를 받아 성경적인 문화와 다르게 변질된 점이 많음을 전제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유대인은 다른 민족과 다르게 왜 질문을 쉬지 않고 해오면서 그들의 문화가 되었고 우리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그것은 텍스트에 있다. 유대인은 세상보다 뛰어난 토라가 있지만 헬라철학가들은 인간이 만든 고전 텍스트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적이 아니다. 대화와 질문으로 고전을 만들어 간다고 보는 편이 옳다. 토라와 같은 성경이 있기에 유대인교육이 가능했다. 성경이야 말로 최고의 질문을 만들어 내는 질문 교과서인 셈이다

하브루타가 무엇인가?

한국에서 하브루타는


하브루타가 한국에 소개된지 어언 10여년이 흘렀다. 하지만 누군가 당신에게 “하브루타가 무엇이죠? 왜 하브루타를 하려고 합니까?” 하고 물으면 대부분 머뭇거리거나 대답을 잘 못한다. 왜 그럴까?

필자는 두 번의 하브루타에 관련된 일을 경험했다. 한번은 필자를 찾아온 한 분과 또 한분의 우연한 만남이다, 두사람의 만남은 아이러니하게도 공통적인 고민을 갖다가 필자와 만난 분들이다. 두 분이 모두 비슷하게 오랫동안 교육현장에 토론 교육에 모든힘을 쏟았다. 그러다가 더 나은 방법을 찾다가 하브루타를 만나 연구하면서 한분은 자격증을 가진 100여명을 배출한 하브루타 전문가(?)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만이다. 더 들어갈수 없었다. 그 다음을 찾으려고 수없이 헤메다 우연히 필자가 집필한 파르데스공부법을 통해 만나 필자를 찾아왔다.

또 다른 한분은 하브루타 문화교육사 자격증을 받고 나서 하브루타 맛보기 교육 3시간 받고 120명을 교육하는 하브루타 강사(?)가 되었던 특이한 경험을 가진분이었다. 그리고 두분의 결론은 나는 이후부터 하브루타 이름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 하브루타에서는 더 이상 원리와 퍼올릴 샘을 찾지 못한 것이 주된 요인이었다. 갈수록 언어유희가 넘치는 한국의 하브루타 현장을 보면서 고민하다 여기까지 왔다고 고백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

또 한번의 일은 어느 대학교에서 박사과정 중에 하브루타 과목을 필자에게 강의해 달라는 강의요청이 들어왔다. 제가 담당자가 물었다. “하브루타가 무엇인데요?” 그러자 그는 “질문하고 토론하는 것이요” 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이것이 지금의 한국 하브루타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도 잘 모르는 하브루타를 강의 해달라는 담당자의 말을 듣고 순간 의아 했다. 소개를 통해 저에게 강의요청이 왔지만 필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은 저는 그런 하브루타는 아직 잘 몰라요 . 일반 질문과 토론교육과 다를바 없는데… 그래서 저는 하브루타란 이름으로 강의하기가 어렵겠네요. “ 물론 어떻게 하브루타 강의를 하려면 할수도 있지만 모르는 하브루타를 강의 할수 없었다. 또 다른 누군가 하브루타 이름으로 강의 할 것이다. 그래서 또 하나의 학위가 나올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 본다.

이 두 사례는 지금 한국사회에 일어나고 있는 하브루타 현장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속에 우리가 들어야 할 메시지가 있다고 본다

하브루타 이름에 대한 고찰이 중요한 이유

하브루타가 한국교육에 영향을 미치는 역사를 이루려면 먼저 이름에 대한 정립이 우선이다. 유대인으로서 당대의 천재라 불렸던 언어학의 대가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한계는 곧 세계의 한계다“ 라고 말한 것처럼 명칭은 모든 것을 설명하는 척도다. 규정된 언어를 더이상 넘어서지 못한다. 이런점에서 지금의 하브루타 이름에 대한 재고찰이 필요하다

물건이 아무리 좋아도 브랜드가 약하면 성공할수 없다. 책도 제목이 안되면 성공이 힘들다. 영화나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이름은 정체성이며 그 콘텐츠를 가장 쉽게 핵심을 설명할수 있어야 한다. 이름은 그 내용을 설명하는 가장 압축된 단어다, 이런 점에서 이름에 대한 바른 고찰은 앞으로 하브루타 교육이 발전하는데 중요하다,

다음은 한 하브루타 단체에서 행한 하브루타 정의에 대한 필자가 제안한 토론 자료의 내용의 일부의 내용이다. (하브루타 이름과 정의의 재정의에 대한 토론 자료)

유대인에게 하브루타 이름의 의미

  1. 아람어에서 유래된 하브루타의 단어의 뜻은 “ 관계. 친구“ 의미를 갖고 있다
  2. 유대인이 말하는 하브루타에서 친구는 유대인의 친구로 유대인 동족에 관계한 제한된 의미다. 엄밀히 보면 이방인은 제외 된다. 우리가 하브루타를 사용한다해서 유대인은 우리를 친구로 과연 생각할까?
  3. 유대인의 하브루타는 토라와 탈무드를 함께 공부하는 친구를 말한다 (cf : 동양의 도반) 진리인 성경을 함께 공부하지 않으면 그와는 하브루타 친구가 아직 형성 안된 것이다)
  4. 본래 하브루타는 공부법이 아닌 관계적인 의미로 유대인 전체의 삶에 적용되는 광의적 의미다
  5. 하브루타는 유대인의 역사와 사회속에 형성된 정체성을 보여주는 이름으로 그들의 문화속에 스며든 보이지 않는 이름이다. 우리가 하브루타 이름을 사용한다해서 그들의 하브루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설픈 하브루타가 될수 있다.

  6. 유대인 사회에서 하브루타 이름이 모임속에 정착된 것은 1980년대의 최근의 일이다.( 이런점에세 정치성을 바르게 정립한다면 한국의 하브루타 교육도 늦지 않았다. 지금이 그것을 정립 할때다)

  7. 필자가 유대인 하브루타 교육방식과 같은 시도를 한 때가 1987년 교회 수련회 중고등부 성경공부 모임이었다. 그 이후에 하브루타교육을 접면서 같은 방식으로 성경을 공부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나만의 공부법을 찾으면 공부가 즐겁다

공부 잘하는 사람은 자기공부법이 있다

인간의 삶은 생애주기에 따라 진행된다. 인간은 약 100년의 생애주기 시스템이 있다. 누구든지 출생-유아기-유년기-소년기-청년기-장년기- 노년기 -죽음에 이르는 인생여정 과정을 따라간다. 사람마다 조금의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 같은 과정을 거친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공부가 이루어지는 과정은 시스템에 따라 움직인다. 공부를 잘하고 싶으면 공부가 이루어지는 시스템을 이해하고 그것을 따라 하면 된다.

실제로 공부잘하는 사람들은 자기만의 공부법이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런 공부 시스템을 갖지 않고 아무 방법 없이 그냥 공부를 한다. 그러나 공부 시스템을 알고 공부를 하면 공부가 쉽고 즐겁다. 점점 가속도가 붙으면서 공부의 재미를 느끼게 된다. 한번 공부 시스템을 몸에 체득하면 평생동안 공부하면서 삶을 즐길 수 있다.

공부에도 시스템이 있다

우리는 그동안 이런 공부시스템을 가지지 못했다. “공부에 무슨 시스템이 필요한가? 그냥 열심히 공부하면 되지… 무슨 공부법인가?” 하면서 지내왔다. 부모들과 어른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있다. “열심히 공부 해”. 그래서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지만 공부가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부모님에게 공부잔소리를 수없이 듣지만 이상하게도 그럴수록 공부는 더 하기 싫다. 이상한 것은 공부를 하라고 그렇게 수없이 말하지만 실제로 어떻게 공부를 하는지 가르쳐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공부법

학교에서도. 부모도 자세한 공부법을 가르쳐주지 않고 오직 “공부하라”고만 말한다. 그러다 보니 공부하는 입장에서 보면 답답할 뿐이다. 마음을 잡고 책을 들여다보지만 이해가 힘들고, 열심히 학교공부를 따라 가려고 하지만 그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 그럴수록 자신에 대해 짜증이 더 난다. 이런 시간이 반복되면 공부가 즐거울 리 없다. 지겨운 공부를 과연 계속 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면서 머리 탓을 하거나, 자책하면서 스스로 고민에 빠지게 된다.

교육의 문제는 공부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우리가 고민하는 교육의 문제는 많은 부분에서 해결이 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교육은 공부문제요, 공부는 자신의 공부법을 얼마나 터득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면 된다.

한번 터득하면 평생가는 공부법이 없을까?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할 수 있을까?” 이것은 누구나 관심을 갖는 주제다. 그래서 수많은 공부의 신(?)들이 자신의 특별한 공부 비법들을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공부법은 어느 한 특별한 사람이 경험한 개인적인 공부법이기에 배경과 상황이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대로 사용해 보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더 좋은 공부법들을 계속 찾는 악순환이 생긴다.

그런 공부법들은 겨우 학과점수를 올리거나 우리나라 유명 대학이나 미국 대학에 좋은 점수로 들어갔다는 정도의 지식 공부법에 머무는 것이 대부분이다. 물론 어느 정도 도움을 얻을 수 있지만 사람의 공부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누구나 적용할 수 있고, 온 국민이 사용할 수 있고.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평생 적용할 수 있고. 자손대대로 전수가 가능한 수천 년 동안 사용할수 있는 공부기 이제는 필요하다
공부는 나의 인생 무기를 갖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6가지 특징

왜 사람들은 이야기를 좋아하는가?



본질성

이야기는 “가공되지 않은 원 재료”와 같다. 이야기를 한다 함은 본래적인 것을 다시 복원하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이야기는 본질적인 것을 드러내준다 . 이야기는 그 이야기 자체가 가지는 힘이 있다. 특별하게 주석이나 교훈을 덧붙이지 않아도 그 자체가 교훈을 지닌다.
듣는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이 되고 교훈을 준다. 이야기 안에는 무한한 것들이 숨어 있다. 만약 이야기를 가지고 다시 인간이 내용을 구조화시키면 그것은 가공된 것으로  본래적인 맛을 상실하고 그것으로 원래의 것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다.
이야기는 이야기로서 전해져야 한다. 그 이야기안에는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이 숨어 있다
이것이 이야기의 본질성이다. 사람들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은 이야기 자체가 본질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편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중심성

이야기는 의사소통(communication)을 위해 가장 널리 사용되어온 매체이다. 이야기는 사람들의 의사소통을 도와주며 서로간에 의사소통을 하는데 큰 효과를 준다.
인간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 거의가 이야기로 채워져 왔고, 계속적으로 이야기에 의해서 아름답게 만들어져 가고 있다. 강의나 설교와 다르게 누구나 할 것 없이 사람들은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며 또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렇게 보면 인간은 이야기를 서로 나누면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인간의 역사는 알고 보면 이야기의 역사이다. 이러 저런 이야기를 통하여 역사가 만들어지고 들려진 이야기는 또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야기라는 말만 들어도 갑자기 흥미가 생기며 재미있을 것 같은 기대가 된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슬픔과 기쁨, 고통과 환희, 절망과 희망, 성공과 실패를 이야기에 올리고 그 이야기를 서로 나누면서 이야기를 듣고 말하는 가운데 자기만이 가지고 있는 깊은 감정들을 치유하고 승화시킨다.
이야기는 어린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좋아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한번 이야기가 시작되면 그 이야기 속에 몰입되며, 이야기와 함께 웃고, 울고, 공감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일이 아니다. 이야기가 시작되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나 그 이야기를 듣0는 사람 할 것 없이 서로 하나되는 경험을 하고 그 이야기 속에 서로 빠져들게 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사람들은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서로간에 깊은 사랑을 느끼고 멀어졌던 사이가 가까워지면서 이야기를 통하여 놀라운 일치를 경험하게 된다. 이야기속에 담겨진 사건의 내용을 말하고 듣는 가운데 우리는 또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삶속에서 경험(experience)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이야기의 문화에 젖어 있는 민족이다. 어릴 때 “옛날 옛날에 ….” 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던 할머니의 모습들이 생각난다.
놀라운 상상의 날개를 펴서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도전하며 그 안에서 새로운 삶을 꿈꾸던 어린시절의 경험은 누구든지 한두번 쯤 있을 것이다.
이런면에서 이야기는 우리들의 삶에 중심에 있다고 할수 있다.

보편성

이야기는 시대와 지역과 문화를 초월 하여 모두를 하나로 연결해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야기는 어린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세대를 묶어 주고 성별과 민족과 문화를 하나로
통합하며 평등하게 한다. 그것은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를 듣거나 어떤 특별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넘어 새로운 세계와 경험을 체험하게 하며 그 이야기를 통하여 새로운 내가 태어나는 놀라운 신비를 가지고 있다.
또 이야기는 누구나 쉽게 알아듣고 이해를 하는 강점을 지니고 있다.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안들은 사람과 다르게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며 하나됨을 느끼게 된다. 아는 이야기를 들을 때 왠지 모르게 동질감을 빨리 느끼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야기를 통하여 한 공동체성을 느끼며 공감하는 부분을 통하여 새로운 연대감을 가지게 된다. 이야기는 현재 들려지지만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과거의 이야기를 기억하게 되고 아울러 현재의 시간에서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시간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하여 과거 . 현재 . 미래가 하나로 통합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상상성

사람들은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며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 자기도 모르는 놀라운 상상력을 펼수 있다.이것은 어린이 뿐 아니라 어른에게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모습이다. 강의를 듣는 것과 이야기를 듣는 것은 차이가 있다. 강의는 그냥 주입식으로 지식적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머리속으로 그림이 그려진다. 그림을 머리속에 그릴려면 상상력이 있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이야기를 자주 들으면 자연히 상상력이 계발된다. 이야기를 들으면 상상의 날개를 펴서 아주다양한 세계를 마음껏 돌아다닐수 있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갈수 있고 내가 그리고 싶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심지어 사람이 아닌 물체와도 이야기가 가능하다. 그냥은 갈수 없는 천국에까지 가서 성경의 위인들을 상상력으로 만날 수 있다. 이것이 상상력이 주는 유익이며 즐거움이다. 사람들은 종종 이런 상상의 세계를 꿈꾸며 그런 세계에 살기를 소원한다.

창의성

이야기는 창의성을 높혀준다.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는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들었던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를 새롭게 창조해 낼수 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나의 이야기를 만든다. 그런 이야기가 나의 현실에 나타나기를 꿈꾼다.이야기는 전혀 다른 것을 만들어 내는 역할을 한다.
동화나 소설을 많이 읽으면서 나에게 창의력이 개발된다. 그리고 어느때인가 나도 그런 소설을 쓰게 된다. 이런 이유에서 사람들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그것은 그런 이야기를 통하여 나의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서 아니면 소설을 읽으면서 어느순간에 내가 주인공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결할 때가 있다. 그것은 이미 이야기를 통하여 내가 창의적인 상황에 새롭게 들어간 것이다. 이야기는 나에게 새롭게 생각할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 준다. 새로운 것을 꿈 꾼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즐거운 일이다.


그래도 공부만한 것이 없다

교육이 살아나면 다 살아난다

한 나라의 장래는 교육에 달려 있다. 교육이 무너지면 모두 무너진다. 그래도 우리 나라가 이만큼 경제 부흥을 이루면서 선진국으로 단기간에 일어설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은 교육에 있다. 남다른 교육 열정이 우리나라를 세운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교육의 잘못된 열정과 빗나간 방향 설정으로 오히려 교육을 도구로 이기적이며 병든 사회로 치닫고 있다.

작지만 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교육에 집중해야 하고 좋은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작은 민족인 유대인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교육 때문이라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이런 원리를 그대로 이어받아 세계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작은 나라들이 많이 있다.

인구가 고작 520만 명에 불과한 핀란드는 극심한 기후에 언어도 지구상에서 다른 어떤 곳에서도 사용되지 않는 외진 나라이다. 그럼에도 미국을 밀어내고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경제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고, 또한 1990년대초 경제 위기를 겪었으나 21세기초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경제국가로 부상한 비결은 바로 교육이다.

뉴욕 세계경제포럼(WEF)에서 파보 리포넨 핀란드 총리가 “두뇌의 힘과 기술에 투자하고 포용력 있고 개방적인 사회를 창출했기 때문이며, 핀란드는 자원을 토대로 한 경제에서 지식에 기반을 둔 경제로 발전했으며 이는 교육의 결과이자 연구ㆍ개발 분야에 집중 투자한 결과”라고 말한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핀란드와 같은 작은 나라인 스웨덴도 마찬가지다. 국토의 3분의 2 이상이 산지인데다 변변한 자원도 없는 나라여서 ‘사람’을 키우지 않고는 먹고살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판단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외 비슷한 환경을 가진, 역시 작은 나라로 알려진 아일랜드, 스위스, 싱가폴, 네덜란드가 세계화 수준에서 경쟁력 1- 4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 나라의 경쟁력은 두말할 것도 없이 지정학적 위치를 충분히 이용할 줄 아는 지혜, 질서를 지키는 국민, 그리고 경쟁력의 바탕이 되는 엘리트 교육에 그 핵심이 있다.

이런 나라들과 비교하여 볼 때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자원이 부족한 작은 나라인 한국이 중요하게 집중해야 하는 과제는 사람이다. 사람으로 승부를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을 교육으로 튼튼하게 세우는 길이다. 이런 교육의 중요성을 알고 있지만 문제는 그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혼란 스러워 하고 있다.

“교육에 대한 명쾌한 해법은 없을까?”
“사람을 살리는 교육이 될 수 없을까?”

국가는 조직이지만 조직이 아니다. 각 한 사람이 모여 이루는 총체다. 국민 한 사람이 중요하다. 국민 한 사람이 건강하고 지혜롭게 되면 국가는 자연히 강성대국이 된다. 그것을 위해서는 국민 한 사람을 교육하는 일이 필요하다. 어떤 외부적인 환경을 개선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민 한 사람을 교육으로 개조하는 일이다. 그런데 왜 그일이 잘 안될까? 필자가 제안하는 중요성에 거의 공감하지만 실제는 이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교육에서 공부로 전환이 일어나지 않아서다. 교육은 교사 입장이라면 공부는 배우는 학생 입장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교육은 주입식으로 강의하고 설득하는 것이라면 공부는 스스로 배우는 자기 주도 학습의 의미가 있다.

이제 한국인에게 필요한 것은 교육을 넘어 공부다. 스스로 공부하도록 돕는 전국민 공부 시스템이 필요하다. 좋은 방안을 제시하고 국민들이 하나 둘씩 공감하며 동참하도록 하는 일이 이루어진다면 머지 않아 한국인도 공부하는 국가로서 지금보다 우뚝서는 일이 생길 것이다.

한국인에게는 아직 이렇다 할 공부가 없다. 누구에게 제시할 공부에 대한 정리가 안되다 보니
부모나 대부분 학교공부가 전부인 것으로 생각하며 30세 이후에는 공부에서 거의 손을 뗀다. 막상 공부하고 싶어도 무엇을 공부할지 모르는 상황이 생긴다. 이런 상황에서 모두가 공부할수 있는 방향과 그것에 대한 실제 공부 매뉴얼을 제시하여 스스로 공부를 하도록 안내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책은 이것을 목표로 집필되었다.

출구를 찾기 어려운 공부, 어떻게 해야 하나?

한국사회에서 가장 관심이 많으면서도, 가장 해결이 힘든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교육이다. 우리나라 교육정책처럼 자주 바뀌는 것도 없다. 그것은 그만큼 문제가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육 때문에 힘들어하는 학부모와 학생들을 생각하면 하루 빨리 좋은 교육정책이 나와야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다. 사실 교육문제만 해결이 되어도 따돌림, 사교육비, 저출산, 가정경제, 일자리창출, 자살률, 1인 가족. 이혼, 창업. 가족 등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저절로 해결이 된다. 교육은 나라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정책과제이지만 지금까지 아직 마땅한 묘책이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

현재 우리 학교공부 환경을 돌아보면 공부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 학교에서 대부분의 교사는 과정을 잘 따라오는 아이들 중심으로 공부를 진행한다. 이것이 학교와 교사입장에서 당장 편하다. 잘하는 아이 중심으로 성적을 올리면 학교 위상이 올라간다. 상위대학에 몇 명 들어갔느냐에 따라 학교 평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어차피 안 되는 아이는 시간 만 보내다가 졸업시키면 된다. 실제로 70-80%는 이렇게 소외된 상태에서 학교에서 시간만 보낸다. 그러다 보니 뒤처지는 아이는 학교 몫이 아닌 부모 몫이다. 이런 상황에서 부모는 당연히 학원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효과없는 사교육에 왜 그렇게 목을 맬까?

이것이 우리나라 사교육이 번성하는 구조적인 이유다. 그렇다고 학원을 보내면 문제가 해결되는가? 그렇지 않다. 학교에서 공부가 안 되는 아이는 학원을 가도 큰 효과가 없다. 학원, 과외. 인터넷 강의 등이 학생들의 공부를 책임져 준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임시방편일 뿐이다. 대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자기만의 공부법을 터득하여 공부한다. 학교나 학원에 의존하기 보다는 자기스스로 공부한다. 이렇게 공부하는 1-2%의 학생들 이외는 대부분 자기 주도적 공부를 하지 못하고 학원이나 과외나 인터넷 강의에 의존하며 겨우 진도를 따라가는 수준이다.

더 큰 문제는 교사와 부모들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기에 그냥 시류에 따라간다. 부모들이 자녀 공부를 위해 수많은 경제적 부담을 감당하지만 그것에 대한 효과는 미미하다. 그래서 유학을 생각하거나 홈스쿨링이나 대안 학교를 보내기도 하지만 역시 그것도 쉽지 않은 모험이다.

모든 부모는 우리 아이가 공부를 잘하기를 원한다. 자녀들 역시 공부를 잘해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다. 갈수록 더해지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앞길은 더욱 희미해질 뿐이다.

평생 따라 다니는 공부. 해결책이 없을까?

지금도 해결의 출구를 찾지 못하고 길을 방황하는 부모와 학교생활에 부적응 자녀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런 답답한 과정을 그대로 겪고 있는 수많은 학생들과 학부모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더 큰 문제는 학교를 졸업했다고 공부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공부는 평생해야 하는 필연의 과제다.

공부는 피할수 없는 인생의 문제다. 학교를 졸업하고 세상에 나와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가정을 이루고 직장을 다닌다고 해서 공부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학교공부보다 더 어려운 치열한 인생 공부가 기다리고 있다. 그런 점에서 세상과 인생 공부를 경험한 사람은 그대로 학교 공부가 쉽다는 결론을 늦게야 갖게 된다. 흔히 “공부가 제일 쉽다”는 말도 이런 점에서 보면 맞는 말이다.

어차피 죽을때까지 공부해야 한다면?

이렇게 보면 공부는 어느 한 개인이나 특수한 학생만의 문제가 아닌 전국민의 문제다. 잠시 학교생활로 마치는 것이 아닌 죽는 순간까지 공부해야 하는 평생의 문제다. 공부는 학교로만 끝나는 것이 아닌 그것이 평생공부와 인생공부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다. 피할수 없다면 즐겨라. 가능한 하루 빨리 즐거운 공부를 터득하는 일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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